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광릉光陵(조선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능) 2024, 10, 6, 본문
사적 남양주 광릉은 조선 7대 임금인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세조는 재위기간 동안 정승들의 권한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였고 직전법을 실시하여 토지제도를 개혁했다, 또 지방의 군사조직을 강화 하였으며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했다,
정희왕후는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아들 예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손자 성종을 왕위에 올린후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했다, 광릉은 조선 최초로 같은 능역내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을 조성한 동원이강릉 형태다,
광릉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제궁(관)을 두는 방을 석실石室 대신 회격으로 만들고 봉분의 병풍석을 생략하여 왕릉공사에 드는 비용과 인력을 절감하였다,
광릉으로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보이는 곳은 광릉 재실이다,
광릉 입구에는 조선왕릉중 유일하게 아직도 하마비(下馬碑)가 남아있다, 하마비란? 조선시대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때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기어 궁가, 종묘, 문묘, 앞에 세웠던 비석이다,
대 소인 모두(누구든)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라는 뜻의 비석이다,
어차피 우리는 여기까지 걸어왔어니 말에서 내릴 것도 없다,
광릉 입구 홍살문과 정자각이 일직선 상에 보인다,
南楊州光陵은 세조의 유언대로 석실과 병풍석을 폐지하고, 석회와 모래, 황토를 섞어 회격을 만들고 난간석만으로 치장한 첫 사례다. 또 왕과 왕후의 능이 같은 능역에 각각의 언덕으로 형성된 동원이강릉으로, 삼년상 동안에만 가정자각을 세워 각각 제례를 지내지만, 기간을 마치면 정자각을 두 능의 중심에 옮겨 짓고 합하여 제향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1468년 9월 8일에 세조가 수강궁 정침에서 승하하였다. 세조가 죽음을 앞두고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마련하지 말라.”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간에 왕릉은 당연히 석실로 지어 왔으며, 석실이 없다면 부장품을 넣을 곳이 없으니, 석실을 폐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종은 세조의 명을 준행함으로써 산릉 공역으로 생기는 백성의 폐해를 줄이겠다고 결정했다.
광릉비각이다, 비각은 능 주인의 생애를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이다, 비각 안에있는 광릉 표석은 1755년(영조 31)에 세웠다,
조선국 朝鮮國
세조대왕 광릉 世祖大王 光陵
정희왕후 貞熹王后 부좌강
조선국 세조대왕 광릉, 정희왕후를 왼쪽 언덕에 모심 이라는 1755년 3월에 표석을 세웠다는 광릉 표석 비문 역문도 있다,
산릉 터는 풍양에 있던 정흠지의 무덤 영역으로 정하고, 예종이 직접 간산에 참여하여 지형을 확인하였다. 기존 묘역을 이장하기 위하여 자손들에게 필요한 물품과 일꾼을 내려 주는 것으로 공역이 시작되어 11월 28일에 국장이 이루어졌다.
1483년 3월 30일에 정희왕후가 온양행궁에서 승하하였다. 왕후의 능은 광릉의 동쪽에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자리 잡았으며, 6월 12일에 국장을 행하였다. 같은 골짜기에 두 개의 능이 각각의 언덕에 조성되는 동원이강릉의 첫 번째 사례였다.
정자각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에 세조의 광릉이 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향으로는 오른쪽이다,
정자각 내부
정자각에서 올려다 보이는 광릉
기신제의 모습과
진설도도 안내되여 있고
정자각 월대 아래 수라간이 있다,
홍살문을 나가면 광릉은 끝이지만 광릉에 묻힌 세조와 6대 임금이였던 어린 단종이야기는 여기가 끝이아니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권력 오른 세조는 남양주 운악산에 묏자리를 미리 봐두고 "국왕 방문을 기다렸다"는 용한 지관을 만났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 여기다,
그리고 세조의 조카인 단종의 그녀가 잠든 곳은 원수의 무덤에서 40리 언덕에 있는 남양주 사릉(思陵)이다,
노비로 전락한 단종 왕비,
정순왕후는 여든한 살까지 살며
원수들의 역사를 지켜보고 광릉에서 15㎞ 떨어진 사릉에 묻혔다,
세조와 광릉
조카의 자리를 빼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1468년 재위 13년 만에 죽었다. 그 13년 권력을 위해 빼앗은 목숨이 너무 많았다. 죽을 때까지 피부병을 앓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불교서적을 편찬해 업보를 씻으려고도 했다. 남양주 땅에 내려오는 전설은 이렇다.
세조는 풍수에 능했다. 하루는 자기 묻힐 땅을 찾아 돌아다니다, 아주 흉한 땅에 아비를 묻는 사람들을 보았다. 근처에 있는 길지를 일러주고 떠나려 하니, 행색이 이장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하여 주머니에서 300냥을 꺼내 이들에게 주곤 묏자리를 잡아줬다는 지관을 물어 찾아갔다.
첩첩산중에 옷도 없이 사는 자였다. 흉지(凶地)를 점지한 연유를 물으니 이리 대답하였다. "대대로 발복할 길지가 그 옆에 있었으나 사는 꼴이 너무 궁색한지라 당장 300냥을 벌 자리를 잡아주었소." 감탄한 세조가 또 물었다. "그런 용한 지관이 왜 이리 옹색하게 살고 있는가?" 기다렸다는 듯 지관은 의복을 차려입고서 마당으로 나아가 절을 하며 이리 말했다.
"국왕이 찾아올 땅이라 이렇게 기다렸나이다." 그리하여 세조가 그 지관에게 명하여 자기 묻힐 자리를 찾게 하니 그곳이 남양주 운악산 기슭에 있는 광릉이다.
세조는 능을 검소하게 쓰라 유언을 하고 죽었다. 능 자체는 별다른 장식 없이 검약하지만, 속칭 '무늬만 검약하다.' 묏자리가 정해진 뒤 사방 15리, 자그마치 3600헥타르(1089만 평)에 달하는 땅에 농사가 금지되고 민간 마을이 철거됐다. 일제강점기에도 건드리지 못한 신성한 그 땅이 바로 대한민국 국립수목원이다.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
수양대군에게 시집갈 때 열한 살 소녀였던 왕비 윤씨는 1453년 음력 10월 10일 남편이 졸개들을 이끌고 김종서의 집을 급습할 때 갑옷을 입혀줄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1468년 세조가 죽었다. 정희왕후 윤씨가 권력을 쥐었다. 열아홉 살에 즉위한 둘째 아들 예종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고, 그가 요절하자 바로 그날 열세 살짜리 손자 성종에게 왕위를 계승시켜 7년 동안 섭정을 했다. 그녀가 1483년 죽자 남편이 잠든 광릉에 미리 마련된 한쪽 언덕에 묻혔다.
그 왕릉을 본다. 겨울에도 피톤치드가 느껴지는 송림 한가운데에 그녀가 묻혀 있다. 홍살문 뒤로 정자각 하나가 서 있고 왼쪽 언덕에 세조가, 오른쪽 언덕에 왕후가 누워 있다. 왕후 잠자리가 더 높다. 세상은 승자(勝者) 독식이니 이 얼마나 무서운가.
또 다른 그녀의 무덤, 사릉(思陵)
윤사로라는 자가 있었다. 단종 즉위 때부터 왕릉을 지키는 수릉관에 임명돼 계절마다 단종으로부터 옷을 하사받던 자였다. 실록에 따르면 1457년 음력 10월 24일 단종이 영월에서 죽고 사흘 뒤 윤사로가 이렇게 주장했다. "(역신들의) 딸들은 공신에게 주어야 한다. 나는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원한다."
윤사로가 탐한 송현수의 딸이 바로 단종의 비 정순왕후다. 사관이 이렇게 썼다. "성질이 잘고 남의 재물을 빼앗는 자였다. "다른 여자의 남편에 의해 자기 남편을 잃은 여자, 정순왕후 송씨는 광릉 15㎞ 거리 언덕에 묻혀 있다. 사릉(思陵)이다. 그녀의 남편 단종을 죽인 시삼촌 세조의 광릉에서 자동차로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왕후에서 노비로 추락한 송씨는 양반집 출가 여인들이 살던 서울 동대문 정업원에 얹혀살았다. 왕실에서 주는 도움을 끝까지 거부하고 동냥질과 염색질로 끼니를 잇고 살았다(염치는 있었던 세조는 노비라도 노역은 시키지 말라고 명했다) 그녀가 울면 동네 아낙들도 같이 울었다. 아낙들은 금남(禁男)의 야채 시장을 열어 송씨에게 몰래 먹을 걸 조달했다.
왕과는 불과 3년 함께 살았지만, 왕후는 모질고 파란만장하고 오래 살았다. 원수인 세조가 죽고 시사촌인 예종, 시조카 성종, 시손 연산군의 죽음까지 지켜보았다. 세조 앞잡이로 나섰던 모사꾼 한명회가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당하는 꼴도 보았다.
그리고 중종 11년(1516년) 영월에 있던 남편 묘에 봉분이 세워지고 제사가 치러졌다. 남편 사후 59년 만이었다. 그 모든 역사적 풍경을 낱낱이 지켜보고서 5년 뒤에 그녀가 죽었다. 여든한 살이었다. 자식 없이 죽은 그녀를 위해 단종의 누나 경혜옹주가 자기 시댁인 해주 정씨 선산에 그녀를 묻었다. 1698년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녀 또한 복위됐고, 무덤 또한 왕릉으로 격상돼 사릉(思陵)이라 호칭됐다. 지금의 남양주 사릉은 그녀의 무덤이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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