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물흐르듯이 순리대로

三浪城 과 전등사(2006년 7월 1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三浪城 과 전등사(2006년 7월 1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06. 7. 1. 20:55

三浪城

일명 鼎足山城 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않으나 단군이 세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 이였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채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

되였어며,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였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과,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1866)때는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 왕조 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겼다,

1976년에는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구했다,

梁憲洙勝戰碑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 을 물리친 양헌수장군의 공적울 기리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라고 새겨져있다,

양헌수장군은 헌종 14년(1848)에 무과에 급제한후 벼슬을 지내다가 1866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을

패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 하고 있다, 크기는 전체 높이가181cm

비신의 높이가163cm, 너비 60cm 두게가 27cm 로 되여있다

1976년에 복원한 남문인 종해루..

성안은 막돌과 흙을 채워서인지 성채안과 바같의 높이는 비교가 되지않는다

예를들어 성채안은 평지인데 성 바같은 막돌을 쌓은 바로 밑은 급격한 낭떠리지(절벽)다,

이 곳은 전등사다,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46년 때인 1259년이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

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종 46년(1259년), 임금이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짓도록 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5년 뒤인 원종 5년(1264년),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 동안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불정오성도량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게 하는,

불교 행사를 일컫는다. 원종 임금이 진종사에서 이런 행사를 갖게 한 것은 당시

진종사의 사세(寺勢)가 크게 중흥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등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당시 정화궁주는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화궁주의

옥등 설화보다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대장경 때문에 전등사로 개칭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근거가 있다.

그 대장경 속에는 <경덕전등록> 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 대조루

를 중건할 때의 모연문을 보면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 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전등사는 고려 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찰이었던 만큼

그 후에도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연이어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