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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찾아 진관사로 그리고 향로봉과 비봉으로,(2009년 6월 6일 - 1) 본문

국내 山行日記/서울·북한·도봉

역사를 찾아 진관사로 그리고 향로봉과 비봉으로,(2009년 6월 6일 - 1)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09. 6. 6. 21:52


천추태후 이야기를 찾아 진관사로 들어갔다, 진관사는 고려 현종 1010년에

창건했다고 하는 설과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이 있기도 하지만, 북한지(北漢志)에선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나는 

한국설화를 근거로해서 1000 년 전 진관사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따라 가보려 한다,

 

 1000년전 고려 경종의 왕비 헌정왕후가 왕의 숙부인 왕욱과 사이에서 대량원군을 낳는데,

가 진관사라는 절로 쫓겨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대량원군은 이후 고려 제8대 왕 현종으로 등극하여

강감찬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물리치게 한다. 이외 불교 전설에선 현종이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운 뒤 진관사라 이름짓고,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제5대 임금 경종이 승하하자 자매 왕비였던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20대의 꽃 같은

젊은 나이에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뛰어난 미모와 정결한 성격으로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던 헌정왕후는

개경에서 10대 사찰의 하나인 왕륜사에 자리한 별궁으로 거처를 옮겨 관음기도를 하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부처님께 의지하여 살아오기 어느덧 10년. 헌정왕후는 어느 날 불현듯 자신의 분신인 아들이나 딸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 무슨 망상인가. 양자라도 하나 들일까 이런 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맴돌던 어느 날 밤, 헌정왕후는 송악산에 올라가 소변을 보는데

온 장안이 소변으로 인해 홍수가 지는 꿈을 꾸었다.  왕후는 하도 이상하여 복술가를 찾아가 물었다.

왕비의 말을 다들은 복술가는 얼른 일어나 아홉 번 절을 하더니 말했다, 매우 길몽입니다. 아기를 낳으면

나라를 통치할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이는 천지신명의 뜻이오니 거룩한 아드님을 낳을 징조

 입니다, 부군 없는 여자가 아이를 낮는 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무렵, 경종의 숙부이자 헌정왕후의 숙부인 안종은 집 가까이 절에서 홀로 지내는

헌정왕후에게 간혹 선물을 보내는가 하면 집으로 초대하여 위로하곤 했다.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경종이 남편이 아니던가? 남편의 숙부라면, 이는 고려왕실의 친족혼 풍습 때문이다. 친족끼리 서로 혼인을

하니 친족관계가 꼬이는 것이다. 아무튼 헌정왕후는 숙부의 정성에 감사했을 것이다. 숙부의 친절에 감사하던

헌정왕후도 존경하는 마음에 호의를 품게되어 손수 수놓은 비단병풍을 답례 선물로 보냈다.

이러는 동안 두 사람은 정을 나누게 됐고 헌정왕후는 홀몸이 아니게 되었다.

지금으로소는 큰일이 나겠지만 당시는 그렇수도 있었든 모양이다,

 

 헌정왕후는 걱정 끝에 안종을 찾아가 송악산에서 소변보던 꿈과 아기를 가질 무렵

관세음보살께서 맑은 구슬을 주시던 꿈 이야기를 하면서 멀리 섬으로 도망가 아기를 낳겠다고 상의했다

내 어찌 왕후를 멀리 보내고 살 수 있겠소. 더욱이 아기는 어떻게 하고, 이런 이야기를 엿들은 안종의 부인은

두 사람을 괘씸히 생각하여 안종의 방 앞에 섶나무를 쌓고 불을 질렀다. 이로 인해 소문이 퍼지게 되고 이 사실을

안 성종(헌정, 헌애왕후의 친오빠)은 안종을 제주도로 귀양보낸다. 이 소식을 들은 헌정왕후는 그 자리에

실신하여 가마에 실려오다 산기가 있어 그날 밤 옥동자를 분만하니 그가 바로 후일의 현종이다.

아주 극적이다. 헌정왕후는 아기를 분만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한편 언니인 헌애왕후(천추태후)는 두살된 왕자 송을 기르면서 별궁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본래 성품이 포악하고 음탕하여 동생 헌정왕후를 시기 질투하던 그녀는 외간 남자들에게 눈을 돌리던 차 간교

하기로 소문난 외사촌 김치양과 정을 통한다,  헌애왕후가 출생한 왕자 송이 18세 되던 해에 성종은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 그 뒤를 송이 이으니 그가 바로 목종이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헌애 왕후는 정사를 돌보면서

천추전에 거처하니 그때부터 천추태후라 불리었다. 이 당시 태후와 놀아나던 김치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호화로움을 누리면서 수많은 부정을 저질렀다.


목종은 김치양을 내쫓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마음이 상할까 염려하여 실행치 못했다

어느 날 태후는 거리낌없이 김치양의 아기를 낳고는 장차 왕위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태후는 김치양과 모의하여 헌정왕후가 낳은 대량원군 순을 궁중에서 내쫓기로 했다. 이때 순의 나이는 12세였다.

이에 대량원군은 백모이며 태후인 헌애왕후가 시기하는 눈치를 채고 번화로운 궁중을 떠나 절에 가서 수도하기로 결심

했다. 그는 궁중에 들어와 설법하는 스님을 따라 개경 남쪽에 있는 숭교사에 가서 머리를 깎고 입산출가했다,

대량군 스님이 남달리 총명하여 10년 공부를 3년에 마쳤다는 소문이 나돌자 태후는 늘 감시를 늦추지

않고 자객을 보내기도 했다. 일설에는 김치양이 보낸 자객이라 한다.

 

 그러나 직감 있는 스님의 경계로 여러 차례 화를 면한 대량군은 그곳을 떠나 삼각산의 조그만

암자로 들어갔다. 암자의 노 스님 진관대사는 대량군이 읊은 시 한 수를 듣는 순간 그가 용상에 오를 큰

인물임을 알았다. 승려들이 목숨을 걸고 대량군을 보호하고 위기를 막았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대량군의 행방을

뒤쫓던 태후는 마침내 삼각산 암자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대량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침대를 놓아 대량군을 기거케 했다 대량군이 3년간의

땅굴생활을 하는 동안 조정은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웠다. 왕은 궁중이 어수선하여 심장병걸렸고,

이 틈을 타서 김치양은 역적을 모의했다.

 

 그러나 강조가 먼저 변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군을 새 임금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날은 대량군의 나이가 18세 되던 날이었다, 새 임금 맞이하니 신천지 열리고 새 일월이 밝아오네 3현6각의

풍악소리가 울리면서 오색 깃발이 하늘을 뒤덮는 가운데 금, 은, 칠보로 장식된 8인교 가마가 산문 밖에 멈췄다.

스님들은 정중하게 행차를 맞이했다, 대량군 마마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특명대사 김응인과 황보 유의는

진관대사에게 예를 올리고 찾아온 뜻을 말한 후 대군의 별당 앞에 국궁 재배했다,


대군마마! 대위를 이으시라는 어명을 받잡고 모시러 왔사옵니다,

 내 운명 기박하여 세상을 등진 몸, 일생을 조용히 보낼 것이니 어서 물러들 가시오, 하지만 대량군은

거듭 간청하는 특사의 뜻과 진관대사의 권유에 땅굴에서 나와 대궐로 향했다. 대군은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

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이라 하고 절이름을 신혈사라 바꾸기를 청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자신의 심기를 달래며 거닐던 신혈사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명했다.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됐다,

진관사는 규모에 비교하여 명성이 높은 사찰이다. 당시는 서울의 외곽이었을 것이다.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산에 자리한 여러 사찰 중에서 비교적 규모가 크고 영험한 불암사, 삼막사,

심원사와 함께 한양 근교 4대 사찰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여러번 행차해 물속의

외로운 넋들과 아귀를 위해 법석을 베푸는 수륙재를 올린 수륙도량으로 유명하다.


진관사는 아주 규모가 큰 사찰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고찰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진관사는 현재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비구니의 수행도량으로서 진관대사의 법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 근대 중창주인 진관비구니스님의 불심 아래 수륙도량의 면모를 정비하고 있으며, 서울 서북부 제1의

포교도량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양의 4대 명찰이라는 애칭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진관사는 자연의조화와 역사가 숨쉬는 곳이다.

 

 문화재가 많지 않은것은 조금 애석하지만 반드시 문화재가 있어야 고찰의 면모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6. 25사변으로 폐허가 된 사찰을 현재 주지인 진관스님이 복구하여 옛 도량의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옛 방식에 의해 지어지고 자리를 잡아 그럭저럭 가람의 향기가 풍긴다. 차를 타고 오르면 좋겠지만

걸어도 좋다. 일주문을 지나 돌담길을 따라 안쪽으로 사역이 형성되어 있는데, 돌담과 맞닿은 홍제루가

누각이면서, 천왕문의 구실을 한다. 또 경내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홍제루 아래를 지나야 하는데,

홍제루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정말 잘 정돈된 정갈한 가람이 한눈에 들어 온다. 2층 누각의

형식을 지닌 홍제루 밑을 지나며 인간의 몸으로 몸을 낮추는 예의를 배우게 된다.

진관사 계곡에서 향로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나도 불광역에서 택시를 타고 진관사로 들어 왔는데 아마 교통이 불편 한게 원인인듯 하다,

계곡물은 아주 맑고 너무차서 아리다,  주변은 온통 흙도없는 화강암인데도 조그마한 흙틈이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살고있다, 오늘 나는 이정표와 사람의 발길로 나 있는길만 보고 한적한

산길을 여유롭게 걷는다, 약 1,5Km 걸었더니 멀리 향로봉의 암릉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무리지어 올라가는 일행을 따라간다,  갑자기 길이없다, 그냥 깍아지른듯한 직벽만 있을뿐!!

아무생각없이 그냥 앞에가는 사람이 타고 넘어가는 발자국을 따라 똑같이 네발로 직벽에 붙었다,

여기는 그 흔한 쐬말뚝도 없고 자일도 없다, 손에 잡히는거라고는 오로지 직벽뿐이다, 한참을 붙어가다가

내려다보니 도로 내려가다가는 그냥 굴러 떨어질것 같고 그래도 기어서 올라가는게 쉬운듯하다,

어차피 붙었으니 죽든 살든 올라가는 수 밖에..

비봉이 바라다 보이는 향로봉과 비봉 중간 지점에 와서야 배낭에서

카메라를 다시 꺼내들고 뒤돌아 보니 불광동 방면에서 향로봉 밑길로 우회해서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는게 보인다, 바라 보이는 향로봉과 치마(전망)바위는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가 있었든 비봉,

  계단처름 생긴 저 직벽을 올라가면 정상이나 저 코스는 오를수가 없다, 그래서 사모바위가 보이는 코스로 올라간다,

현재 이곳에는 비석이 놓였던 자리와 비석의 옛터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서 있다.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비(碑)는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보관하고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비 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

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 : 백과사전


비봉 정상 아래 바위에 걸터 앉아 커피를 따라 놓고 둘러보니 사모바위와 나한봉,

  문수봉과 대남문 그리고 보현봉까지 한눈에 들어 온다, 온통 바위산이기는 해도 보면 볼수록 멋있다,

 꽤나 큰 잠자리장이 있는 사모바위 앞 까지 왔다,

그리고 돌아본 비봉!!

사모바위 헬기장에서 온길을 돌아보니 비봉도 보이고 향로봉도 보인다,

 여기서 문수봉 방향으로 약 300m쯤 더 가면 삼천사로 내려가고 아래로는 승가사로 내려가는

길이지만 이대로 하산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이르다, 그래서 내친김에 대남문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