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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www.gg.go.kr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 제16대 인조는 明명과 가깝게 지내는 정책을 펼쳤다. 당시 명과 대치하고 있던 後金 후금이 1627년(인조 5년)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 정묘호란 이며, 이 전쟁을 계기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 관계를 맺었으나 두 나라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자 국호를 淸청으로 고친 후금은 순식간에 한양으로 처들어 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당시 남한산성 내 식량은 두 달 분량도 되지 않았다. 고립 무원 상태로 버티던 조선은 강화도까지 함락되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을 스스로 걸어 나온 인조는 청의 군대가 머물고 있던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굴욕적인 협정을 맺었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울 것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바..
김포 장릉으로 왔다, 우선 배치도를 보고나서 김포 장릉 안내소로 들어가면 매표소에서 장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문화유산방문여권 스템프함이 있다, 여권 95페이지 89번 칸에 스템프를 찍는다, 문화재청 조선왕릉에 실린 장릉을 찾아보면 1619년(광해군 11)에 선조의 왕자 정원군(원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 이듬해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묘를 조성했는데. 1623년에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원대원군으로 추봉되고, 1626년(인조 4)에 계운궁 연주부부인(인헌왕후)이 세상을 떠나자 김포 성산에 육경원을 조성했는데. 이때 정원대원군의 원의 이름을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다. 그리고 1627년에 흥경원을 육경원으로 천장하면서 원의 이름을 흥경원이라 했다가, 1632년(인조 10)에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
삼랑성 서문에서 전등사로 들어가면서 처음올 만나는 곳이 강화정족산성 진지다, 江華 鼎足山城陣址 강화 정족산성진지는 강화군 전등사에 있는 조선시대 정족산 사고를 수호할 목적으로 조선중기 이후 설치된 국방시설로. 2014년 4월 16일 인천과역시의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된 곳이다, 정족산성진지는 1907년 방화로 전체 소실되어 평탄지로 있던 곳을 2008년 발굴조사하여 11개소의 건물지를 포함 대규모 유구를 발굴했다. 1870년대 이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족산성진 지도에 표현되어 있는 내사, 진사, 포량고 등의 건물지와 담장시설, 문지 등을 대부분 확인했어며. 발굴된 일부 건물지의 경우 정족산성진 설치 이전인 1784년(정조 8년)에 건립된 정족창과 관련된 건물지로 파악된다.정족산성진지에서 내려다 보는..
강화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로 40분정도 걸려 도착한 전등사 남문버스정류장에서 전등사로 들어간다, 전등사 남문안내소에서 문화유산방문 여권 93페이지 87번째 여권스템프를 찍고 전등사 경내 지만 기념품도 팔고 막걸리도 파는 식당을 지나서 올라가면 삼랑성(정족산성)남문이 있다, 江華 三浪城 강화 삼랑성은 일명 정족산성 이라고도 한다, 성안에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어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남문으로 들어가 오른쪽 성곽을 따라 올라간다, 성곽을 따라 올라가다가 내려다 보는 삼랑성 남문은, 주변 경관과 잘 어우려 지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삼랑성 4대문 중 누각이 있는 문은 남문이 유일하다, 삼랑..
지난 6월 25일 이곳으로 와서 강화역사박물관에서 문화유산방문여권 92페이지 + 여권스템프를 찍고 갔는데 돌아가서 정리를 하면서 확인을 했더니 역사박물관 여권스템프는 +스템프이고 강화 고인돌 유적 스템프는 91페이지에 86번째 스템프가 있는데 이 스템프를 찍지 않아서 다시 이곳으로 왔다, 역사박물관으로 가는 입구에는 어떤 이유? 인지는 모르 겠지만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유적비가 있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유적비는 1932년 박인용의 江都誌 강도지에 따르면 강화도 고려산 북쪽에 위치한 시루봉 중턱에 연개소문이 살던 집터와 연개소문이 말과 함께 달렸다는 치마대, 말에게 물을 먹였자는 五井 오정에서 무예를 갈고 딱았다고 전하고 있다,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이다, 김무식은 ..
연천전곡리유적지다,사적 제268호. 유적을 둘러싸고 한탄강이 흐른다. 해발 40~50m 되는 곳에 있으며 1978년에 발견되었고, 1979~83년에 6차례, 그리고 1986, 1991년에 발굴되었다. 석기는 전곡현무암층 위에 쌓인 퇴적층에서 나온다, 칼륨-아르곤(K/Ar) 방법에 의한 절대연대측정에서 전곡현무암층의 가장 윗부분은 약 28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연천전곡리유적지 안내소에 있는 문화유산방문자여권 60페이지 51번칸에 스템프 를 찍었다, 우리나라의 강안단구에는 뗀석기가 들어 있는 붉은흙층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이 퇴적층의 윗부분에는 추운 기후에 생성된 것으로 가늠되는 쐐기 모양의 토양구조가 흔히 발견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전곡리유적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전곡리유적에 ..
고석정입구 광장 분수대도 가동 할 만큼 더운날 고석정이 잘 내려다 보이는 장소를 찾아 광장 끝으로 가다보면 1억년 역사의 숨결 신비로운 고석바위 와의 만남 이라는 표지석도 있다, 그길 끝에 보이는 정자는 세종강무정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세종강무정 世宗講武亭은 어떤 역사를 지닌 곳일까? 안내를 보니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철원평야(대야잔평)에서 강무 講武훈련을 마치고 머물렀다는 곳이다, 강무는 국왕이 직접 참가하는 군사훈련 겸 사냥 행사로 수만명의 군사들이 참가했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와 측우기 발명으로 유명하지만 4군 6진을 개척하여 지금의 영토를 확정하고 국방력 강화에 온 힘을 쏟은 왕이다, 세종은 재위기간 총 19회에 걸쳐 93일 간이나 철원에서 강무를 진행했고 사냥이 끝나면 이곳 고석정 孤石亭..
포천아트밸리는 1960년대부터 30년동안 국내 제일의 단단하고 질 좋은 포천석을 채석하던 체취장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양질의 화강암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폐 채석장으로 방치되어 황페화 되였던 곳을 2004년부터 2009년까지 포천시가 훼손된 자연경관을 친환경으로 복구했다, 채석장 일부는 과거 공간을 그대로 보존해서 근대산업 유산의 흔적과 문화예술 공간을 만들어 자연을 훼손한 반성의 공간을 함께 살려낸 의미있는 장소로 역사와 생태, 문화 예술 및 교육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포천이트밸리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 아트밸리 홈 페이지 인용 - 포천아트밸리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는 채석장이 변신한 곳이지만 지금은 그림같은 에메랄드빛 호수, 그 위를 병풍처럼 깎아지른 화강암 절벽, 자연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