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이 순리대로
만리장성 - 6, 명이(明) 청(靑)으로 바뀌는역사 속 장성(八达岭长城, 바다링창청), 2018년 1월 15일 본문
만리장성 - 6, 명이(明) 청(靑)으로 바뀌는역사 속 장성(八达岭长城, 바다링창청), 2018년 1월 15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8. 2. 3. 05:30이제 팔달령장성(八达岭长城, 바다링창청)에 들어오든 장성입구로 해서 남성(南城)으로 간다,
북성에서 제일 높은곳에서 사방을 둘러보았어니 남성으로 가서 남성쪽에 있는 장성을 둘러보아야 할것 같은 욕심에 서둘러 내려간다,
꼬불 꼬불 이어지는 끝이 없어 보이는 장성을 따라가고 따라가도 이곳에서 보는 거나 별반 차이가 없을같은 생각이다,
북성 4루 바깥에는 이런 시설이 있다, 물론 4루에서 암문을 통해 내려갈수있는곳이다,
저곳은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가는 모노레일 종점이자 출발점이다,
내려다보니 각루마다 있든 암문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갈수 있고
바깥으로 나가면 장성이 아니드라도 아래로 내려갈수있는 산길이 있다,
팔달령 남성이다, 이곳에서 보이는 남성은 저멀리 산위까지 길게 이어저 있다,
지금 우리가 있는 북성 4루는 해발이 1015m다, 국내로 치면 큰 산 정상이나 만찮 가지인 셈이다, 장성은
사방으로 들러서 있는 험준한 산세를 따라 뻗어 있는 웅장한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이렇게 끝없이 이어진 성이니 만리장성이라 한게 아니든가, 그러나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장성은 그 길이가
동쪽 하북성(河北省)산해관(山海關)에서 서쪽에 있는 감숙성(甘肅省) 가욕관(嘉峪關)에 이르기까지 총 6,300km에 걸처있다,
중국정부는 2009년에 만리장성의 길이를 8,851km, 2012년에 21만196km,라고 발표한 적도있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 공산정권의 팽창주의적 역사관을 뒷받침 하기 위한 터무니 없는 주장으로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강변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남아있는 장성의 길이는 열심히 보수중이지만 약 6,000여 km 인 것으로 알려저 있다,
장성은 기원전 220년 진시황(秦始皇)(BC 259~BC210)이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해 쌓기 시작했다,
만리장성 축조는 그후 명나라시대(1368~1644) 장수 척계광(1528~1588)이 거의 마지막으로 보수할때까지 지속되였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북방의 군대를 대비해 만든 만리장성 방어선이 스스로 무너진 이야기를 하려 한다,
북방 연산산맥 발해만에서 베이징까지는 420km나 된다, 설사 만리장성이 없더라도 기마병으로 이루어진 만주의 군대가 이 험준한
연산산맥의 봉우리를 넘고 또 넘어서 명나라로 쳐들어 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렇다면 만주에서 건국한 청나라는 어떻게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차지 했을까? 해답을 얻어려면 친황다오 시내에 있는 동북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으로 가야 한다,
산해관은 명나라의 최전방 요새다, 만주에서 베이징으로 진격 하려면 연산산맥과 만리장성을 넘어야 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 했다, 유일한 방법은 산해관을 통과하는것 뿐이다, 청나라 군대는 명나라 최전방 요새인 산해관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청나라의 중국 정복에는 세 사람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그 첫번째는 농민 반란 지도자
이자성(李自成 1606~1644)이다, 1644년 시안에서 발호한후 스스로 왕이되여 베이징으로 진격해, 4월 24일 베이징에
입성한다, 다음날 명 황제는 자금성 뒤 북해공원 언덕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고 자살해 명은 멸망했다,
둘째는 명나라장수 오삼계(吳三桂 1612~1678)다, 오삼계는 라오닝성의 군사요충지에 주둔하다
이자성 반란군을 토벌하려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지났다, 베이징으로 진격하든 오삼계는 4월 26일 베이징이
이자성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산해관으로 회군한다,
세번째는, 청나라 실권자인 다이곤(1612~1650),이다,
천재적인 군사 지도자 였든 그는 나이 어린 황제의 섭정으로 실질적인 권력자였기 때문에 섭정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북경을 장악한 이자성은 오삼계의 아버지 등 가족들과 애첩을 감금하고 항복을 명했다, 오삼계가 답하지 않자,
아버지를 참수하고 산해관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분노한 오삼계는 청나라 섭정왕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조선왕조 인조실록에는
이 극적인 순간에 관해 당시 청나라 군대에 머무는 인조의 세자를 모셧든 사신의 보고로 상세히 기록되여 있다,
오삼계가 섭정왕에게 구원을 청하기를, 황성(皇城)이 유적(流賊) 이자성에 함락됨으로서, 황제는 스스로 목매여 죽고
후비 이하는 모두 분신 자살했다, 그래서 관내 여러성이 모조리 다 함락 되였고 오직 산해관만이 남아있어나 급하기가 시각을
다투는 형편이니, 귀국과 함께 그들을 토벌하기를 약속 하고자 한다 고 했다,
청병(淸兵)이 마침내 급히 달려, 22일 아침 관문에 가까이 당도하니 오삼계가 여러 장수를거느리고 성을나와
항복문서를 바치고, 성문을 열어서 청병을 맞아 들였다, 이때 한인은 관내에 수리 정도 떨어저있는 큰 들판에서 적병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청병이 곧바로 적진으로 돌격해 싸우니 죽은 시체가 들판을 덮었고, 남은 적들은 모두 패하여 도망쳣다,
청군은 끝까지 이들을 추격해 해구(海口)에서 모두 죽이고 대승을 거둔다,
다음날인 23일 아침에는 북경으로 진군했다, 청나라가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을 주살한 산해관 전투는
정확하게 1644년 5월 27일이였다, 후세 사(史)가들은 오삼계가 청나라군대를 이용해 이자성의 반란군을 무너뜨린 다음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청나라의 기마병은 오삼계의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결국 청나라
섭정왕은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준 덕분에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대륙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북방민족의 침략을 대비해 그토록 오랜세월동안 쌓아온 만리장성을 스스로 내준 결과가 되였다,
역사는 순리대로 흘러갈뿐 가정이없다, 청나라 군대는 만리장성을 넘은것도 아니고, 성문을 파괴한 것도 아니다,
인조실록에 기록된 대로 오삼계가 성을 나와 항복 문서를 바치고 성문을 열어 청병을 맞아들였다,
장성을 지키든 한족(漢族)이 관문을 열어 주어 중국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조금 이야기가 길어 졋다, 그러나 거대한 중국대륙은 명(明)이후 청나라시대가 열린다,
청나라는 누루하치가 여진족(만주족)을 통일하고 1616년에 후금을 건국한 후 아들인 태종 홍타이제가
청으로 국호를 바꾼 나라로 중국대륙을 대표적으로 지배한 왕조였다, 우리에게도 자손대대로 영원히 잊어서도
안되고 잊을수도 없는 삼전도의 치욕을 안긴 병자호란의 당사국이 청국이다,
청 초기 강희제, 건륭제,등 휼륭한 황제들이 통치했고 한족의 명나라 뿐만이 아니라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점령해 중국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이루였어며 1683년부터 1830년까지 이민족으로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했다,
청나라는 8대 도광제부터 말대 선통제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의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저 멸망하고 중국 역사에서 2천여년 넘게 이어진
봉건왕조시대가 끝나게 되고 그 소용돌이 역사의 중심에 있든 만리장성도 이제 세계속의 관광지로 변했다
이제 다시 아침에 들어왔든 팔달령장성 입구까지 돌아왔다,
이제는 남성(南城)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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