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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산을 바라보며 왕들은 국태민안을 기원했다(2021년 7월 11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목멱산을 바라보며 왕들은 국태민안을 기원했다(2021년 7월 11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1. 7. 12. 18:07

지하철1호선 서울역 4번출구를 나가면 숭례문이다,

한양도성 남쪽에 있어 남대문이라고도 부르는 숭례문은 한양도성 정문이다,

남산으로 가는길은

숭례문 오른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인도

보도블럭에 설치되여 있는 한양도성 순성길 표식이 보인다,

남산입구 계단을 올라가서

오늘쪽으로 가면 한양도성이다,

도성길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백범광장이 있다, 

백범광장 아래쪽에 있는 이시영선생 상,

선생(1869~1953)은 1910년 경술구치를 당하자 가족 50여명과 함께

남만 유하현 추가보로 망명해서 독립군을 양성하기위해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1812년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확장하여 1920년 폐교 될때까지 3,500여명의 독립군

간부를 배출했어며 이들이 그 유명한 청산리 독립전쟁의 주축을 이루었다,

광장위쪽으로 백범 김구선생상이 있다,

이 일대가 백범광장이다, 가운데 보이는 높은 건물이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남산분관이다, 이 건물은 박정희대통령시절

육영재단 소속의 남산 어린이 회관이였다,

백범광장에서 올라가면

안중근의사 기념관앞 자연석 비석들이 있는곳과

오른쪽으로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주차장앞에는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이 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일대는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성곽을 훼손했던 곳이다. 서울시는

2013~14년 한양도성 보존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 일대를 발굴했다. 현 전시관 일원에서는

총 길이 약 189m의 한양도성 유적이 발굴되었어며. 발굴 결과 땅 속에 묻혀있던

성곽의 기저부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 유구는 조선시대 축성기법과 석재(石材)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다. 유적전시관이 자리잡은 남산자락은 한양도성의 오랜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양도성 유적(1396)을 비롯해 조선신궁 배전터(1925), 남산 분수대(1969)

등을 포괄하는 전시관 권역에서는 조선시대 축성의 역사, 일제강점기의 수난, 해방 이후의

도시화, 최근의 발굴 및 정비 과정을 한 눈에 살펴 볼 수있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내내 지속적인 보수를통해 유지되었다. 

이 유적은 태조(14세기), 세종(15세기), 숙종 이후(18~19세기)에 쌓았던 부분들이

하나의 성벽을 이루고있어 시기별 축성 양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성곽을 훼손했던 이 지역 일대의 모습이 되살아난 듯 하다,

한양도성의 유구와 함께 6~70년대 서울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던

남산분수대 자리에서는 이승만 대통령동상 기초가 발견되기도 했다. 1956년 당시

2억6백만환의 거금을 들여 제작한 이승만의 동상은 4.19 혁명으로 해체되었지만 본체만

7미터의 높이에다가 기단까지 합치면 무려 25미터에 달하는 초대형이었다.

한양도성유적 전시관을 지나서 남산봉수대로 올라간다,

오늘은 재미없는 역사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한다, 조선시대 경복궁과 마주한

목멱산을 바라보며 왕들은 국태민안을 기원했다. 백성들도 목멱산 정상의 봉수대에서

해질 무렵 피어오르는 한줄기 봉화에 변방의 무사를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조선시대 목멱산은 국토와 왕경을 수호하는 신산(神山)으로 산 정상에는

목멱대왕을 모셔놓은 국사당(國師堂)이 자리했다. 목멱산으로 불렸던 남산은 왕과

백성이 모두 우러러 보는 한양 중심의 영산(靈山)이었다. 조선 500년 도읍지 한양의 수호산인

남산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건 1880년대 중반부터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으로 정국이 요동친 직후인 1885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해 

왜성대(倭城臺)라 불렸던 예장동(藝場洞)일대에 일본인 거류지를 형성했다,

 

남산을 거점으로 본격적으로 조선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한 일본은

청일전쟁후 입경하는 일본인 수가 해마다 배 이상 급격히 늘어나면서 1898년,

지금의 숭의여대 자리에 경성신사를 세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정치가 실시되면서 일본은 남산에 통감부청사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식민통치에 들어간다. 한옥마을에는 일본군 헌병대가 주둔했다,

1900년대 초 남산 일대는 경성이사청 외에도 정무총감 관저,

일본 적십자사 등이 들어서면서 식민통치의 심장부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1906년에 설치한 경성이사청은 예장동 주변을 경성공원으로 만들고, 남산식물원 자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회현동 일대 30만평을 고종에게 영구 무상 임대 형식으로 받아내

1908년 한양공원을 조성한다.

 

한일병합 일주일 전 1910년 8월22일, 고종에게 전권위임장인

칙어를 받아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남산자락의 통감관저를 찾아 데라우치가

내민 한일병합조약 서류에 일고의 망설임도없이 도장을 찍고 나라를 통째로 넘겼다.

한국 황제는 한국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는 내용이 담긴 한일병합 조약이다,

이로서 1910년 10월 22일 조선왕조 500년의 명줄이 완전히 끊켯다.

조선을 손아귀에 넣은 일본은 백성의 출입과 개발이 제한되었던 남산 일대를 마음대로

훼손하면서 핵심 통치기구인 통감부와 독부를 비롯해 각종 기관과 일본 거류민들을

위한 주거지, 상업시설 등을 전면 배치했다.

남산 자락인 충무로와 퇴계로, 명동일대는 일본식 신시가지로 꾸며 북촌에

견주어 남촌으로 불렀다. 식민지배층의 특권적 공간 남촌에는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경성우편국(현 중앙우체국),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등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주로

조선인이 살고 있는 북촌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1906년 1만 명이 조금 넘던 일본인은

한일병합이 되던 1910년 서울 인구의 14%인 3만3천명에 이른다,

3,1만세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남산산록 중 가장 눈에 띄는

회현자락에 조선신궁을 세워 조선인의 정신까지 옭아매었다. 경성의 랜드마크인

남산은 그들이 야망을 실현시키려는 경성~용산 축의 중심이었다. 여기까지

언급한 역사는 신문기사와 백과사전등에 있는 내용을 인용 작성했다,

남산정상으로 거의 다 올라간 지점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남산케이블카 터미널이다,

남산케이블카 터미널 상단에있는 편의시설일대,

남산타워에서 부터 시작한 사랑의 자물쇠가 이제 이곳까지 옮겨져 왔다,

이어서 남산정상 목멱산봉수대다, 봉수대는 조선시대 전국팔도에서

올리는 봉수(烽燧)의 종착점이다. 봉수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변방의

정세를 알리는 시각(視覺)신호를 말한다. 평시에는 1개의 봉수를 올렸으며, 변란이 생기면

위급정도에 따라 2개부터 5개까지 올렸다. 봉수대는 전국에 620여 개소가 있었는데

남산에 있는 5개소의 경봉수(京烽燧)를 최종 목적지로 편제되어 있었다.

목멱산 봉수대는 세종 5년(1423)에 설치되어 1895년까지

500여년간 존속했다. 현재의 목멱산 봉수대는 청구도등 관련자료를 고증하여

1993년 남산 제3봉수 자리로 추정되는 현 위치에 복원한것이다,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4호다.

남산케이블카 정류장에서 남산봉수대 남산정상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자물쇠는 손 들어갈 틈도없이 빼곡히 걸려 있지만 지금도

진행중이다, 예전에는 사랑의 약속을 열쇠로 잠그고 영원히 변치않을 것을 다짐하는

의식이였다는데 요즘에는 언약이 아니라 추억만들기 놀이리고 한다, 

남산정상에있는 남산타워다, 남산 서울타워는 효율적인 방송전파

송수신과 한국의 전통미를 살린 관광전망시설의 기능을 겸비한 국내 최초의 종합

전파 탑으로 방송문화와 관광산업의 미래를 위해 건립했다. 지난 40여년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서울의 상징물 역할을해 내외국인들이 즐겨찾는 서울 제1의 관광명소다.

남산타워 높이는 236.7m이고 남산 높이까지 합하면 479.7m다.

2000년대 들어 여러 FM방송국들이 관악산으로 송신지점을 옮겨가

디지털 TV방송의 수도권 메인 송신소가 남산이 아닌 관악산으로 지정됨에 따라

남산은 현재 서울 강북/도심지역 중계소 역활을한다

남산 정상을 잠시 돌아보다가

서을시내 북쪽지역 인왕산이 있는 곳을보니

가랑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날이라 짖은 운무에 가시거리가 제로다,

남산정상에서 남산공원길로 내려간다,

남산정상부에 있는 유일한 야외화장실

그리고 중부녹지공원 안내센터가 있는

남산정상 버스정류장이다, 이곳은 일반차량은 통행이 불가하지만

남산을 운행하는 전기버스는 수시로 운행한다,

남산버스정류장을 지나

장충동 국립극장방향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길에 피여나 있는 꽃들도 보면서 지나간다,

시계방향으로 자주루드베키아, 페투니아, 협죽도, 뉴기니아봉선화등이 보인다,

내려가는길 양쪽으로 갈라지는 곳이 보인다,

왼쪽으로 들어가는 길은 있지만 통금길이다, 미8군 방송인 AFKN방송

송출시설이 있었든 곳으로 아직 반환받지 못한 곳이다,

AFKN 방송 송출시설로 들어가는 도로 아래로

한양도성 성곽이 이어진다, 이곳의 한양도성은 태조때 조성한 성으로

60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완벽하게 원형그대로 보존되여있다,

내려가는길옆 숲의 모습이다,

여기는 밀림지대가 아니라

서울 남산이다,

전기버스가 다니는 일방통행 1차선 도로와

인도가 있어 길도 널널하다,

남산도로에서 한강일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만들어진 전망대도 있다,

오늘 보이는 것은 이게 전부다,

용산미군기지와 국립중앙박물관, 동작대교 정도만 희미하게 보인다,

가깝게는 울창한 숲도 보이지만

들어가 볼수는 없다,

남산의 상징 소나무도 곳곳에 있다,

이제 국립극장 뒤로 왔다,

오른쪽은 국립극장과 장충단공원으로 가는 도로고

왼쪽은 남산북쪽지역 순환도로다, 

남산 북측 도로인 남산공원길로 간다,

이 길은 차량은 물론 이륜차나 자전거도 이용할수 없는 인도전용 길이다

길 가운데 노란색 실선이 이어지는데

이 실 선은 인도 중앙분리선?으로 우측 통행이 확실히 되고있는 길이다,

남산북측 순환로에는 소나무가 많다,

이곳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는데 소나무 보호차원에서 통제를 했어며

소나무 힐링숲 견학 희망자는 서울의 산과 공원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하고 들어가야 한다,

소나무 전체 수량은 49,300주, 기존소나무가 31,000주 이고 식재 소나무가

18,300주며 수령 100년 이상된 지정보호수도 6주나 있다,

남산 소나무 분포도 도 있다,

계속해서 북측 순환로를 따라간다,

가랑비가 내리는 날이지만

싱그러운 숲길처름 느껴지는 남산 북측 순환로

남산석호정이다, 석호정은 활터다,

이곳에 발을 씻을수 있는 수도 시설이 있다, 그 이유?는 

북측순환로에는 석호정까지

황토길이 있는데 맨발로 걸어오면 발을 씻어라고 만들어 놓았다,

황토길은 꽤나 먼 거리에 이어저 있다,

북측순환로는 서울 도심과 가깝게있는 길로

숲이 걷히면 이렇게 보인다,

도심이 보이는 곳 조망대에 남산공원이라고 적힌

도장찍는 함도있다, 특별한 구간은 없어나 이곳으로 왔었다는

기념 스템프를 찍는 모양이다,

스템프를 찍는곳 아래 숲에 백일홍이 보였는데

백일홍 밑둥을보니 족히 수십년은 된 것 같은 나무다

 

길 옆에는 인공으로 만들어 지기는 했지만

작은수로와 연못도 있다, 비 가오지 않을때는 펌프로 물을 퍼 올려서

개울에 물이 흐르게 만들어 놓았다,

이 길은 예전에 차가 다니든 도로다,

숭례문에서 시작해 이길로 국립극장 뒤로 해서 남산정상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출발한 지점으로 내려오든 도로다,

북측순환로에 큰 건물이 보인다, 남산1호터널 기계실이다,

남산에는 모두 3개소의 터널이 있는데 1호터널은 남산골 한옥마을이 있는

남산골공원 중구 필동로 8가길 41에서 한남동으로 연결이 되고

2호터널은 중구 장춘로 101

유관순열사 동상이 있는 곳에서 녹사평대로로 연결되며 

3호터널은 남산케이블카가 있는

중구 소공로 3길 29-5에서 녹사평대로 로 연결되는 터널이다,

여기까지 지나오면서 길 옆에 핀 꽃들

시계방향으로 산수국, 접시꽃, 꽃이 피여있는 화단과

맨드라미꽃 등이 활짝피여 있다,

이 길을 가다가 힘들면 언제든지

잠시 쉬여가라는 장 의자도 곳곳에 있다,

와룡묘가 있다, 남산에 있는 와룡묘는 중구 예장동에 있는

서울시 민속자료 5호로 제갈량을 모시는 신당이다, 와룡묘 경내에는 정전인

와룡묘와 단군성전, 삼성각이 있는데 이 세건물은 순서대로 점차 높이를 달리하여 산의 지형에

맞게 세워저 있다, 정전인 와룡묘는 제갈량과 관우,단군, 산신등을 모신 신당으로

중국 신앙과 우리 토속 신앙이 결합된 독특한 신앙형태를 하고 있다,

이제 북측 순환로를 벗어나서

반공건국청년운동 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짧은일생을 영원한 조국에" 라고 새긴 위령탑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후 대한민국 건국 과정과 1950년 피어린 6,25동란을

통하여 수많은 청년들의 자기 희생과 투쟁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수 없었다,

조국과 자유를 위해 살신성인한 수많은 반공 청년들의 고귀한 피의 희생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정을

금할길 없다, 해방 60주년을 맞아 17,274위의 순국동지들의 위패를 봉안한 자리에 누락된

265위의 위패를 묻고 순국하신 동지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탑이라 안내되여 있다,

위패를 묻고 위령비를 세운 자리는 육군 제1보병사단 창설지다,

위령탑을 내려가면 바로 남산골 왕 돈가스 거리다,

그리고 이곳에는

숭의여자대학교와 뒤편으로는 숭의초등학교가 있어며

숭의여자대학교 앞

소파로 건너에는 숭의여자 대학교 별관도 있다,

그 옆으로는

남산 리라초등학교가 있다,

1964년 1월에 설립한 리라초등학교는

중구에 위치하고 있는 사립 초등학교로 학교 이름은 명예 교장의

딸이자 전 교장인 권리라 여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리라초등학교 앞 중구 예장동일대에 들어서고 있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아직은 공사중이지만 앞으로 또 다른 모습으로

예장동을 바꿔놓을 것 같은 규모로 건설되고 있다, 

아니메이션센터에 이어서 남산예장공원이 있다,

일제의 침략역사와 군사정권의 각종 고문으로 얼룩졌던 남산 예장자락이

남산 르네상스 공사 12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과 TBS교통방송 건물이 철거된 자리에는

서울광장의 2배 규모인 1만3036㎡ 녹지공원이 조성됐다. 공원 하부 지하에는

남산 일대를 달리는 친환경 녹색순환버스 정차 환승센터와 40면 규모의

관광버스 주차장도 조성되여있다.

과거 남산 예장자락은 조선시대 군사들의 무예훈련장과 녹천정,

주자소등이 있던 곳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통감부와 통감관저가 설치되고

일본인 거주지가 조성되면서 급격히 훼손됐다. 1961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 건물이 들어서면서

각종 고문과 탄압이 자행됐고, 시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로 변했다.

서울시는 오세훈시장 재임시절인 2009년 남산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발표하고 남산의 생태환경과 전통 역사문화유산을 복원하는

작업을 벌여왔다. 당초 예정보다 예장자락의 완공이 늦어진 것은 남산경관을 가리고 있던

기존 건물과 시설을 철거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사가 지연된 덕에 오 시장이 시작한 남산 르네상스 사업이

12년 만인 6월 9일 오 시장의 손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게 됐다. 남산예장공원

입구에는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해 명동에서 공원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고 지상 녹지공원에는

남산의 고유수종인 소나무 군락을 비롯해 18종의 교목 1642주, 사철나무등 32종의

관목 6만2033주 등 다양한 나무를 심어 풍성한 녹지를 회복했다.

예장공원 앞 퇴계로를 건너

명동대성당과 영락교회가 있는 사이길 삼일대로 로 간다,

가는길 좌측은 명동성당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이며 오른쪽 앞에 보이는

삼각지붕 형태의 건물이 영락교회다,

三一路 는 안국역 사거리에서 낙원상가를 지나 세종호텔까지의 구간이다.

1984년 기점을 조정해 오늘에 이른다. 겸재 정선의 도성대지도 와 김정호의 수선전도 에도

나오는 길이다. 삼일로라는 이름은 1966년에 3,1운동을 기념해서 붙였다, 삼일로에는 길의 이름만큼

유명한 공간이있다. 창고를 빌려 탄생한 소극장, 1975년에 개관했으니 30년 넘게 이 자리에 있는

삼일로 창고극장은 퇴계로2가에서 을지로2가 방면 인도를 따라가는 고갯길에 있다.

명동성당교차로를 건너가면 오른쪽 빌딩이 남대문세무서고

왼쪽 3번째 빌딩은 고용노동부가 있는 건물이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장교빌딩을 지나면 청계천으로 연결된다,

청계천2가 삼일교에서 상류에 있는 다음 다리는

청계천 장통교다, 장통교 북단에는 개천따라 청계천 최고의

예술품이라는 정조반차도가 있는 곳이다, 높이 2.4미터에 길이만도 192미터다.

세계 최대 규모의 도자벽화다. 취타음악도 들리고 말발굽소리도 들리는

듯한 청계천변이 여기다,

장통교 앞에서 종로로 가는길

비가 내려도 이 길 종로까지는 비를 맞지않는 종로12길

종로 12번길 끝은 종각역 12번 출구다,

종로12번길 중간에서 왼쪽에 있는 종각방향으로 간다,

이 길의 끝 빌딩 5층에서 오늘의 뒷풀이다, 

2021년 7월11일은 초복날이다, 닭 대신 삼겹을 구워

조촐하게 한잔한다, 먹는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함께한 정겨운

사람들과의 끈임없이 이어지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더 맜있다,

어떻게 보면 이런게 사람사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숭례문에서 시작한 걷기가 오늘은 약 10km 납짓이다,

앱 기록은 9,12km지만 요즘에는 중간에 자주 앱이 끊어지는 바람에

항상 거리체크가 제대로 잘 안된다, 

코로나 창궐로 한번도 가보지못한 거리두기 4단계가

7월 12일부터 25일까지(2주간) 서울, 경기, 인천등 수도권에서

시행되며 오후 6시이후 모임은 2인까지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