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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原州 江原監營(이조시대 강원도청)2021년 9월 12일 본문

Trail(둘레길)/치악산둘레길

原州 江原監營(이조시대 강원도청)2021년 9월 12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1. 10. 1. 05:08

치악산둘레길 7코스 싸리치길을 끝내고

택시로 원주시내에 있는 강원감영으로 왔다, 감영으로

들어가는 문은 포정루다,

감영은 관찰사가 주재하며 정무를 보던 곳으로,

강원감영은 1395년(태조 4)처음 설치된 후 1895년(고종 32) 조선

8도제가 23부제로 될 때까지 500년 동안 유지되여 왔다.

 옛 건물로는 문루와 선화당, 청운당만이 남아 있으며,

2000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물터와 연못터 등을 찾아냈다.

2002년 3월 9일 사적 제439호로 지정되었다. 감영지 내에 있는 포정루(布政樓)와

선화당은 별도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원 감영

입구에는 이렇게 강원감영 배치도 와 감영 안내도 있다,

감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였어나 1634년 원주목사

이배완이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후 여러목사와 관찰사들에 의해 계속해서 다시 지였다,

감영 布政樓(포정루)로 들어간다, 포정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

건물로. 장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안쪽 초석은 높이를 낮추고

두개의 기둥을 세워 판문(板門)을 달았다.

2층은 누마루를 깔아 넓은 다락을 만들고 사면을

개방했으며, 마루 주위에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럿다.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며 네 모서리에만 반자를 설치한. 조선시대

감영의 건축 형태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포정루(布政樓)를 들어가면 中三門(중삼문)이 있다,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으로 출입하는

진입공간에는 포정루(布政樓)와 중삼문(中三門), 내삼문(內三門)이 있는데

중삼문은 세개의 진입공간 배치상 중간에 있는 문으로 포정루를 지나 온 사람들은

중삼문에서 재차 본인의 신원과 방문 목적을 밝혀야 했다,

중삼문은 관동관찰사영문 이라는

고유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강원감영의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서 들어서는 문을 의미한다,

중삼문(中三門)앞에서 돌아다 본 포정루(布政樓)

중삼문(中三門)을 들어 간다, 옛날에는 중삼문에서 신분 확인과

방문 목적을 밝히는 절차를 거쳣을텐데 오늘은 아무런 제재도 없이 들어간다,

중삼문(中三門)을 들어가니

왼쪽에 비석이 일 열로 나란히 세워저 있다,

이 비석은 원주 각처에 있든 비석 14기를 감영복원시에 옮겨온 

觀察使(관찰사)및 牧使(목사) 善政碑(선정비)다,

중삼문과 내삼문 가운데 넓은 마당에는

조선시대 투호놀이 광장이다, 강원감영 관찰사가 있든 시절에도

이곳에서 투호놀이를 했는지?는 알길이 없지만

지금은 투호놀이 공간이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쇠로된 병을 놓고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서 화살 같이 만든 청 홍의 긴 막대기를 던져서 더 많이 항아리 속에

던져 넣느냐를 겨루는 놀이로 옛날 궁중에서 여자들이 많이 했다고 하는 놀이다,

중국 당나라에서 시작되어 고구려, 백제때 궁중 상류사회 사람들이 즐겼던

놀이로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경회루에서 직접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놀이가 투호놀이다,

내삼문(內三門)이다, 내삼문의 고유한 이름은 澄淸門(징청문)이다,

澄淸門(징청문)은 포정루, 중삼문을 지나 관찰사의 집무공간인 선화당과 직접연결되는 문이다,

징청문(澄淸門)은 관찰사를 포함하여 방문자까지

이 문을 들어서는 모든 관원들이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관찰사의 정무공간인 선화당은 대궐의 정전을 연상케하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다,

조선시대의 사적지로 2002년 3월 9일 사적 제439호로 지정되었다.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1395년(태조 4)에 원주에 설치되었다.

감영은 조선시대에 각도의 관찰사(觀察使, 監司)가 정무를 보던 청사로

원주, 전주, 평양의 감영을 제외하면 한곳에 계속 있지 않고 소재지의 변천과

도시화 등으로 그 본래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강원감영에는 당시의 건물인 선화당, 포정루(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와

청운당(내아)이 원 위치에 남아있고, 2000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결과,

관련유구(중삼문지, 내삼문지, 공방고지, 책방고, 보도, 담장지, 행각지 등)가 비교적 잘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의 건물지 등의 하층에 잘 보존되어 있어

우리나라 관아 건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원주시는 강원감영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강원 정도 600주년이 되었던 지난 1995년부터 강원감영지를 도심 속

역사문화사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복원정비 자료를 마련하기

위하여 발굴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선화당, 포정루에 대한 보수공사와 중삼문,

내삼문, 행각에 대한 복원공사를 실시하여 강원감영의 일부만을 복원,

2005년 8월 31일자로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다음백과사전 인용-

선화당 옆 강원감영사료관이 있다, 사료관은

조선시대 500년간(1395,태조~1895 고종32) 국가의 지방통치기구였든

감영감영의 역사를 살펴보는 공간이라 안내되여 있다,

행각 안내부터

강원감영 안내까지

도자기에

각종 사료까지 ~

감영사료관의 자료는 500년 세월을 모두 이해 하기에는

자료가 많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나 역사의 흔적을 이해할수는 있을 것 같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각도에 파견되여 지방 통치의

책임을 맡았든 최고의 지방 장관으로 감사, 도백, 방백, 외헌, 도선생,

영문선생등으로 불리다가 1466년 세조 12년에 관찰사로 호칭이 정착되였어며

강원도 관찰사는 도내의 모든 군사와 민사를 지휘, 통제하여 조선의

중앙집권 체제 구축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안내도 있다,

강원감영에서 일하든 사람들이 400여명 규모 였다고 하는

조선시대 강원감영의 규모를 보면 지방정부의 웅장함이 엿보인다, 지금은

원주 감영이 왜소해 보이지만 한때는 원주역부터 남부시장까지

30개 동의 건물이 모여있을 만큼 웅장했다고 한다.

사료관을 나와서 선화당으로 가보니 감영의 중심 건물인

관찰사의 집무실 선화당은 1395년 강원도에 감영이 설치될 당시 포정루와 함께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소실된 것을 나중에 재건하여 국가사적으로 지정했다.

8도 감영 중에 선화당이 제 자리에 남아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선화당 내부는 이런 모습이다, 선화당은 단층 건물이지만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포석루보다 웅장했다. 선화당을 빙 두르고 있는

툇마루는 사방이 뚫려있다. 위엄과 격조가 느껴지는 대궐이다,

사료관 옆에 전시되여 있는 강원도 관찰사 행차도에는

관찰사 행차시 수백명이 호위했다고 적혀있다,

행차에는 말과 둑과 기를 앞세우고 나팔과 태평소를 불면서

행차를 했다고 하는 행차도를 그려 놓았는데 조선시대 임금의 행차와는 규모는 작지만

그 위용이 대단하였음을 알수있는 대목으로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된다,

관찰사가 공무를 보든 공간을 지나

감영 후원으로 들어간다,

후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들어가니

경복궁 후원처름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이 정도로 복원되여진 규모만으로도 조선시대 지방정부의

화려함이 상상을 뛰여 넘는다,

강원감영 후원권역 안내를 살펴보니

강원감영 후원권역은 관찰사의 사적인 공간으로 연못을 조성하고

봉래각, 영주관 등을 건립하고 손님 접대와 연희의 장소로 사용했다, 라고 시작하는데

연못 가운데와 한쪽 끝에는 정자를 세워 연못을 내려다 보며

후원의 풍경을 감상할수 있도록 하였다, 강원감영후원에서는 다른 감영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 세계를 엿볼수 있다, 

연못 안에는 전설의 신산인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만들어 전각을 짓고 모두 신선 세계의 이름을 부여했다,

후원에 있는 느티나무는 600년이나 되였다,

봉래산 인 금강산을 관활했든

강원감영의 후원에 어울리는 신선 세계를 만들었든 것이다,

관찰사들은 후원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스스로를 봉래주인,

즉 신선 세계의 주인이라 했다, 강원 감영의 후원은 일제강점기 까지는

유지 되였어나 이후 후원자리에 한때 원주 우체국이 자리 했어며 2018년 강원감영

복원 사업이 완료되여 아름다운 후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였다,

삼신산은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 이라고 믿는

세 신산으로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을 봉래, 지리산을 방장, 한라산을 영주,로 일컬었다, 라고 적혀 있다,

연못 가운데 있는 영주관으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건물 동쪽과 서쪽에 각각 무지개 다리를 설치했다,

연못에 무지개형 아치형 다리를 놓은 것은 뱃놀이를 즐기기 위한 것이라 했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 들어가니 현판은 관풍각이라 붙어있다,

연못가운데 있는 건물의 이름은 영주관이다,

영주관은 신선이 산다는 세 개의 산중 하나인 영주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1987년 정선군수로 부임한 오횡묵이 남긴 정선총쇄록에 의하면 밖에는 관풍각

안에는 영주관이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기술되여 있다,

연못 끝에도 정자각이 잇었어나 그곳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돌아가야할 KTX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연못을 한바뀌 돌아서 다시 선화당으로 나간다,

돌아 나가면서 보는 영주관은 그림처름 아름답다, 치악산 둘레길을 걸어면서

처음으로 와 보는 강원감영 오래도록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감영 후원에서

감영 중심건물인 관찰사 집무실 선화당으로 나왔다,

정문인 포정루로 나간다, 삼베를 둘둘 말아 한필 두필

보관해 두었다가 쓰는 것처럼 정사를 부드럽게 잘 시행하라는 뜻이 담긴

누각 이름이 포정루다, 청렴결백한 마음으로 덕을 쌓아 백성을 돌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감영 정문을 나가서 길을 건너 시내로 들어간다,

감영 정문 맞은편 골목 일대다,

큰 빌딩들은 아니지만 상가지역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감영이있는 여기는 원주시내 중심지역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