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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탕춘대성을 따라 천년의 사찰 진관사로(2011, 6, 20)조블뉴스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탕춘대성을 따라 천년의 사찰 진관사로(2011, 6, 20)조블뉴스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11. 6. 20. 23:30

 

구기동입구에서 탕춘대성 유일의 암문인

독박골 암문 으로 해서 향로봉으로 올라 간다

독박골 암문으로 해서 향로봉으로 따라가는 성곽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연신내의 주택가 

탕춘대 성은 도성과 북한산성의 외성곽 이다,

앞에 보이는 우람한 화강암의 봉우리가 향로봉이고

오른쪽 뽀죽하게 서있는 봉우리가 비봉이다,

2000년전 백제는 한강남쪽 위례성에 터를 잡는다, 

북한산에도 토성이 축조됐다. 백제 개루왕 5년(132)의 일이다,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세력이 한반도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서울은 성의 역사가 시작 되였든것 같다

향로봉 앞에 있는 쪽두리봉이라 불리는 곳이다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한 것으로,

명칭은 세검정 부근에 있던 탕춘대(蕩春臺)에서 따왔다.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웠다

왼쪽에 바위로 보이는 곳이 비봉, 가운데가 문수봉, 오른쪽 제일높은 봉우리가 보현봉이다,

탕춘대성곽길을 따라 오르면서는 이렇게 사방이 다 조망된다 

300년 세월속에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성곽이 있는가 하면

역사의 소용돌이속에 파괴되고 훼손되여 그 형체를 알아볼수없는 구간도 있다

독박골 암문에서 사방을 조망하면서 오르다 보면

구기동 이북 5도청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에 탕춘대성 탐방안내소가 있다

향로봉은 비법정 탐방로이다, ~ 그래서 향로봉 정상으로 오를수는 없지만

정상 8부 능선쯤에서 우회하는 길을 따라 비봉으로 간다, 

향로봉 정상이다, ~ 아주 날카롭게 생겼다,

아름답고 멋스러운 자연 ~ 사람도 자연의 일부가 아닐까?,

분명한 구별은 되지 않지만 탕춘대성은 여기로 오르기전 어디에선가 끝난다,

이제부터는 북한산 향로봉 자락인 셈이다, 

탕춘대 능선을 따라 향로봉으로 오르는 길,

아주 깊은 산중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곳이다 

울퉁 불퉁한 돌길을 따라 오르는길, ~

모두가 화강암 이다,  그래서 오르는 길도 멋스럽다 

이정표가 1,3km만 가면 비봉이라 알려준다, ~ 보통 1,? km 하면 다간 느낌이 드는게 산길이다, 

여기 쯤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고 차 한잔 하는 지점이 된다,

 예전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남진하면서 한강 일대는 고구려의 영토가 된다.

백제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와 손을 잡았다. 그후 다시 고구려가 퇴진하자

백제는 한강 하류, ~ 신라는 죽령 이북 강원도 까지 점령했다,

그 후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가 깨지면서 이 지역은 신라의 땅이 된다.

555년 10월 신라는 북한산 비봉에 삼국통일의 초석이 되는 진흥왕순수비(국보 3호)를 세웠다.

그 비봉이 지금 사진에 보이는 제일 높은곳에 있는 봉(峰)이다,

향로봉 아래 우회 화강암길 을 따라 비봉능선으로 올라 간다, 

이런 암릉이 미끄러운 길이라면 상당히 위험 할것 같다,

그러나 북한산 전체의 암릉은 발에 달라 붙는듯한 느낌이 드는 화강암으로 되여 있다 

 탕춘대 능선을 타고 향로봉 아래로 돌아 올라온 길,

북한산은 어느길이나 모두 다 이렇게 아름다운 조망을 보여 준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장악했다는 기념비가 있는 비봉이다,

현재 그 비는 국립중앙박물관 에 보관돼 있다. 비문 에는 왕의 방문 목적과 비를 세운 동기가 새겨져 있다.

순수비는 1200년 세월동안 잊혀져 오다가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해 세상에 알려졌다.

비문에 새겨진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지금 비봉에 세워 놓은 것, 사진에 보이는 비 는 복제품이다 

바로 앞에 사모바위 앞으로 이어지는 응봉능선이 길게 내려서 있다,

그 뒤로 장엄한 암봉들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곳은 북한산 8개의 봉우리가 있는 의상능선이다,

의상능선 넘어 삼각형을 엎어 놓은듯한 큰 바위가 노적봉이며, 노적봉 뒤로는 백운대 와 만경대의

화려한 위용이 끝없이 펼처저 있는게 시야에 들어온다,  세상 어느곳에 이처름

아름다운 산이 있을까?, 정겹도록 아름다운산 북한산이다,

비봉을 지나 사모바위로 가다보면 승가사로 내려가는 길과 진관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오늘은 천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진관사로 내려간다,

비봉능선에서 진관사로 하산 하는길은 두길이 있다,

향로봉 못미처서 내려 가는길과 비봉 아래서 내려 가는길

향로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계곡을 따라 내려 가는길 이고

비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계곡과 능선 중턱을 타고 내려 간다, 

여기도 좀 가파르다 하면 이렇게 쇠줄로 안전 장치를 해놓았다,

비나 눈이 올때에는 이렇게 해놓았어도 미끄러운 길이니 조심해야 하는 구간이다,

비봉에서 진관사 까지는 쉬엄 쉬엄 걸어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늘이 많은 곳이라, 여름철 산행 구간으로는 아주 좋은 곳이다, 

지금 진관사 계곡은 말라 붙어있었다,

여름철 이 계곡에 물이 흐르면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계곡의 바람소리가 끝날즈음에 불현듯 나타나는 진관사 ~

진관사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1,000년전 고려 경종의 왕비 헌정왕후가 왕의 숙부인 왕욱과 사이에서

대량원군을 낳는데, 그가 진관사로 쫓겨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대량원군은

이후 고려 제 8대 왕 현종으로 등극하여 강감찬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물리치게 한 임금이다,

천추태후로 알려저 있는 헌정왕후의 친 언니 헌애왕후는

정부 김치양의 아기를 낳고 장차 왕위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에 대량원군은 백모이며 태후인 헌애왕후가 시기하는 눈치를 채고

삼각산의 조그만 암자로 들어갔다. 암자의 노스님 진관대사가 대량군을

끝까지 보호해서 후일 현종이 된다. 이 때의 진관 노스님의 이름이

오늘의 진관사 가 태동 했다고 전해저 내려오는 역사속의 절이다,

진관사 뜰 한켠에 예쁘게 핀 활연화, ~

진관사는 규모에 비교하여 명성이 높은 사찰이다.

당시는 서울의 외곽이었을 것이다.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산에 자리한 여러 사찰중에서

비교적 규모가 크고 영험한 불암사, 삼막사, 심원사와 함께 한양 근교 4대 사찰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여러 번 행차해 물속의 외로운 넋들과 아귀를 위해

법석을 베푸는 수륙재를 올린 수륙도량으로 유명하다,

진관사는 아주 규모가 큰 사찰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고찰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진관사는 현재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비구니의 수행 도량으로서

진관대사의 법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양의 4대 명찰이라는 애칭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진관사는 자연의 조화와 역사가 숨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