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국내 山行日記/문화유산투어 (24)
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송광사는 사적 제506호.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의 본사로 한국 선종의 대수도 도량으로 유서깊은 僧寶寺刹(승보사찰)이며, 통도사, 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로 꼽히는 절이다. 송광사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송광사사적비 松廣寺事蹟碑〉 〈보조국사비명 普照國師碑銘〉 〈승평속지 昇平續誌〉에 의하면 신라말 體澄(체징)이 길상사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2023년 7월 30일 전남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에 있는 송광사를 찾아 왔다, 송광사로 들어가는 구 매표소에서 문화유산 여권 43페이지 34번칸에 여권스템프를 찍는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불국토이니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어야 입국이 허용 되나보다 ㅎ 송광사일주문으로 들어가면서 왼족으로 보이는 첫 건물은 송광사를..
선암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이 AM 10 : 17분, 서울에서 05시에 출발해 순천선암사까지 5시간이나 걸렸어니 멀어도 한참은 먼 거리다, 물론 중간 휴게소 아침 식사 시간 포함해서다, 선암사로 들어가면서 첫 건물인 선암사 안내소에서 문화유산탐방여권에 순천선암사 스템프도 찍고 순천 선암사는 542년(진흥왕 3)에 阿道和尙 아도화상이 처음으로 개창하여 毘盧庵 비로암 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이것을 그대로 믿기 어렵고. 875년(헌강왕 1)에 道詵 도선이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朴全之 박전지가 쓴 靈鳳山龍巖寺重創記 영봉산용암사중창기에 지리산 聖母天王 성모천왕이 만일 세개의 巖寺 암사를 창건하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 라고 한 말을 따라 도선이 ..
종로3가역 11번 출구에서 종묘시민광장으로 가서 宗廟 종묘전교로 간다, 종묘전교는 종묘 앞쪽 세운상가 입구 부근에 있던 다리다. 준천사실과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宗廟前橋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고지도에는 다리 모양만 표시되어 있다. 세종길록에 따르면 회동, 제생동천은 지금의 가회동 인근 북촌 가회방에서 시작해 남족으로 흘러 청계천과 합류 했지만 홍수에 따른 민가 피해를 막기위해 세종대에 종묘 앞으로 인공제방을 만들어 동쪽으로 물길을 돌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회동, 제생동천은 도시화 과정에서 매립되어 완전히 사라진 하천이다, 종묘전교를 지나서 종묘 외대문으로 들어간다, 宗廟 종묘 정문인 외대문 오른쪽 매표소에서 매표를하고 입장을 하면 외대문 안에 문화유산여권 스템프함이 있는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昌德宮 宣政殿 창덕궁 선정전으로 들어간다, 선정전은 창덕궁의 왕의 공식 집무실인 便殿 편전이다, 인조 25년(1647)에 광해군이 세운 인경궁의 광성전을 헐어다가 지었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로 보물 제814호다선정문에서 선정전으로 이어지는 복도 건물은 지붕이 있어 비가오거나 눈이 와도 출입이 자유롭도록 만들었다,선정문에서 선정전 까지는 이렇게 이어진다,선정전은 창덕궁을 창건할 때 건립되었으나 인조반정 때 소실되어 1647년에 중건했다. 장대석을 바른층 쌓기를 한 단의 월대 위에 넓은 장대석 바른층쌓기 기단을 만들고 다듬은 초석들을 놓은 다음에 그 위에 12개의 평주와 2개의 고주를 세웠다.기둥과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은 다포식 구조로 지은 건물이..
경복궁역에서 지하철로 1정류장 안국역 3번 출구에서 창덕궁으로 가는길 현대건설 사옥을 지나가면서 보니 여기는 계동궁터라는 표석이 있다, 현대건설 일대는 현대원서 공원이다, 또한 이 일대는 사도시 터로 조선시대 궁중의 미곡과 장 등의 물건을 맡은 관청으로 1392년(태조1) 고려의 제도를 따라 요물고를 설치 하였다, 이후공정고, 도관서로 바뀌였다가 사선서에 흡수 되었어며 시도시라 개칭되였다, 1882년(고종19)에 폐지 되었다, 현대공원이 끝나면 창덕궁 돈화문이 있다, 창덕궁 담장 바깥에는 예전에 안 보이든 창덕궁 매표소가 이렇게 새로 만들어저 있어 여기서 매표를하고 돈화문으로 창덕궁으로 들어간다 돈화문으로 들어가면서 왼쪽에 있는 이 나무가 창덕궁 회화나무 군으로 천연기념물이라는 안내도 보인다, 내용은 돈..
2023년 4주 일요일인 7월 23일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가는길 불로문이 있다, 불로문은 한장의 판석으로 만든 석문으로 이 문을 통과하면 만구무강과 불로장생한다고 하는 청더궁의 불로문을 모방해 제작한 문이다, 모방을 했어도 불로문이니 당연히 불로문으로 들어갔다, 경복궁역에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가는 출구는 경복궁역 5번 출구다, 고궁박물관 출구 벽에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여 있는 유물들 사진을 찍어서 벽에 붙여 놓았다, 조선 태조 금보와 영친왕비 적의와 대삼작노리개 를 시작으로 영조임금 초상과 청화백자 용무늬 항아리 와 암금의 초상화를 모시는 곳에 쓰인 병풍과 제기 십장생도와 왕세자 성균관 입학식 그림에 흉배용 봉황문 목판 까지 전시되여 있는 사진 유물들을 보면서 고궁박물관 으로 나가니..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27세의 나이에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개칭한 뒤, 배봉산 기슭에 있던 무덤을 1789년(정조 13년) 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했다. 조선 최고의 명당에 조성된 융릉은 추존왕이라는 사실에 무색할 정도로 장중하고 화려하다. 봉분 아랫 부분에는 연꽃 문양이 조각된 섬세한 병풍석을 둘렀고, 능 앞에는 팔각형과 사각형의 석등 양식을 결합한 장명등을 세웠다. 묘역의 불을 밝히는 장명등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진 이 장명등은 조선 왕릉에 있는 장명등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다. 융릉 서쪽 울창한 숲길 너머에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www.gg.go.kr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 제16대 인조는 明명과 가깝게 지내는 정책을 펼쳤다. 당시 명과 대치하고 있던 後金 후금이 1627년(인조 5년)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 정묘호란 이며, 이 전쟁을 계기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 관계를 맺었으나 두 나라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자 국호를 淸청으로 고친 후금은 순식간에 한양으로 처들어 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당시 남한산성 내 식량은 두 달 분량도 되지 않았다. 고립 무원 상태로 버티던 조선은 강화도까지 함락되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을 스스로 걸어 나온 인조는 청의 군대가 머물고 있던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굴욕적인 협정을 맺었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울 것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