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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역사가 숨쉬는 대륭시장, 교동읍성, 망향대(2022년 1월 1일) 본문

국내 山行日記/그곳에 가고싶다

역사가 숨쉬는 대륭시장, 교동읍성, 망향대(2022년 1월 1일)

물흐르듯이순리대로 2022. 1. 14. 00:42

2014년 7월에 개통된 교동으로 들어가는 교동대교다,

고구려 시대에는 고목근현 이고 신라 경덕왕때에는 교동현, 고려시대는

벽란도로 가는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국제교역의 중간 기착지였다.

교동대교앞 해병장병들에게 간단한 검문절차를 거치고

민통선내 출입증을 교부받아 차에 부착하고 교동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교동에서는 이름난 대풍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나왔더니 식당입구에 줄을 서 있다,

국밥집이 였는데 조금은 옛날 맛이 나는 그런 식당이다, 문제는 주차장이 없어

골목 어디인가에 주차를 해야 하는게 불편했다,

교동에서는 하나 뿐이자 역사가 있는 시장이니

대룡시장 구경을 한다, 

골목 곳곳에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벽화들과 조형물,

오래된 간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60년대 표어가 적혀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자,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1년에는 국민소득 1000불이 목표였든 시대,

인구가 많아 지면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였어니

한가정 한아이 사랑가득 건강가득, 이라는 구호는 당연하지 않았을까?

건설의 해 구호도 있다, 삽들어 건설하고 총들어 승공하자,

건설하고 승공하는 것 만이 살길이였든 시절이 였어니 이런 구호마저도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설에나 나올 것 같은 구호,

대룡시장은 황해도 연백군에서 피난온 실향민들이

고향에 있는 시장인 연백 장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든 골목시장이라고 한다

시장 입구에

교동안내도가 관광추천코스를 알려준다,

청춘 부라보 상점

전통쌍화차 교동궁전다방이 있는 골목

마루뜰

은자매네 떡 방아간

머르메 농장 백떡

함지박이 주렁 주렁 달려있는 골목시장 골목

사람들이 제일 많았든 장소다,

60년대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대룡시장에만 있는 과자

동: 동: 뛰운 쌍화차

여기도 다방이다,

교동 호떡은 찹살과 녹차씨앗으로 만든다는 호떡인데

젊은 사람들보다 연식이 있는 분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60년대 시계 수리 점포도 있어며

교동 제비집 빈대떡에 옹심이 팟죽 집도 있는데

모두 골목 골목에 숨어 있다,

교동은혜농장 집에는

전직 대통령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담벼락에는 연산군 이야기도 쓰여 있다,

해무낀 나루 건너 교동 동에 가면 고개 숙인 연산군의 아픔을 보리라,

화개산 구릉지 비탈진 언덕배기 햇볕마저 외면한 가시울 속에서 수치와 슬픔에 떠는

곤룡포를 보리라,~ 연산군은 조선 제10대 임금(재위 1494년~1506년)으로 

중종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폐위되어 이곳으로 유배되여 그해 11월

유배지인 이곳 교동에서 사망했다.

대룡시장으로 처음 들어온 곳으로 다시 돌아 나간다,

교동은 대중교통이 불편해서 자차가 아니면 돌아보기가 버거운 지역이다,

그리 큰 시장은 아니지만 골목 골목에 숨어있는 60~70년대의

예전 모습이 그대로 이어저 오는 시장이다,

대륭시장에서 차로 5분 거리인

교동읍성으로 왔다,

교동읍성 안내에 따르면 둘레 약 430m. 높이 약 6m.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인 이 성곽은 강화도 서편의 교동도에 축조된

고을성으로 1629년(인조7)에 쌓은 것이라 안내되여 있다.

성을 쌓은 목적은 서해안의 방어를 위한 것으로

조선시대 후기에 이 성 안에 三道水軍統禦營(삼도수군통어영)의

본진이 주둔했든 곳이라고 한다, 남문앞 거북형상의 비석 받침돌이 있는데

무슨 비석이 있었을까? 비석은 보이지 않는다,

원래 이 성에는 3곳에 문루를 갖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에는 통삼루(統三樓), 북문에는 공북루(拱北樓), 남문에는

유량루(庾亮樓)란 문루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영조 29년(1753년)에는 당시의 통어사 백동원이

성곽과 여장(女墻)을 고쳐 쌓았고, 고종 21(1884년)에는 통어사 이교복이

남문을 중건하고 또한 문루와 성벽을 수리 했지만 공사를

끝내지 못했다.

그 뒤 1890년(고종 27)에도 동문과 북문을 고쳐 세웠는데

세월이 흘러 무너졌다고 한다. 특히 남문의 유량루는 1921년의 폭풍으로

무너졌으나 홍예(虹霓) 부분만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서해안 도서와 해안을끼고 있는 지역에서는

외적 방어를 위해 고을성을 많이 축조 했는데 이곳 교동읍성 외에도

강화읍성, 충청남도의 해미읍성과 안흥성, 전라북도의 고창읍성,

전남 진도의 남도석성 등이 있다.

교동읍성 안으로 들어가면 

현재 남아있는 읍성은 보이는게 전부다,

읍성하면 무었인가? 볼거리가 있는 줄 알고

찾아 왔는데 남문 누각과 좌 우에 남아 있는 성곽이 전부다,

문루에는 庾亮樓(유량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교동읍성에서 약 15분 정도를 달려서

교동 망향대로 왔다,

망향대 주차장에서 망향대로 잠시 올라가면

망향대는 한국 전쟁 때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와서 정착한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는 곳이였다. 

남북 분단 이전 교동도와 연백군은 같은 생활권으로 왕래가 잦았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연백군이나 황해도에서 교동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교동에 남았다,

1960년에 물길을 건너 연백군이 눈앞에 잡힐듯이 보이는 이곳에

실향민들이 비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는 장소다,

많은 리본이 걸려있는 곳에 우체통이 있는데

우체통에 편지를 붙이면 이북으로 배달은 되지 않지만 

수녀님들이 기도로 배달한다는 우체통이다,

625 한국전쟁 당시의 사진들과

북한 모습의 사진들도 전시되여 있다,

망향대에서는 2대의 망원경을 통해서

연백군 일대의 마을 풍경도 볼 수도 있는데 

아래 사진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 비숫한 크기의 사진이고

조금 당겨보면 이 정도는 보인다,

그리고 10배 정도로 당겨 보면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보인다,

망원경으로 보면 연백군 연안읍 아파트와

큰 건물들도 생생하게 보이는 가까운 거리인 이곳에 망향대가 있다,

망향대 마당 한켠에는

망향 카페가 있고 카페 앞에는 

안내문이 있는데 건너다 보면 연안읍 진산인 비봉산과 남산

남대지등 드넓은 연백평야가 눈 앞에 전개되어 소리를 지르면 고향들녁에 울려 퍼질듯하고

손을 벌리면 고향산천이 3km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다, 라고 설명이 되여있다,